하와이대학교 한국학연구소 3.1운동 심포지움 발표 <2> - 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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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03월02일 04시5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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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위터로 보내기페이스북으로 보내기미투데이로 보내기 하와이대학교 한국학연구소 3.1운동 심포지움 발표 <2>
3.1운동 후 하와이 한인사회 움직임, 한인들의 활동 조명
<지난 주에 이어 발췌본 계속>
 
3) 일본제품 불매운동과 일본인과 같은 직장 거부
 
4월 23일 애드버타이저는 국민회 중앙총회 (샌프란시스코)가 각 지역 국민회에게 일본이 한국의 독립을 승인할 때까지 일본제품 불매운동을 계속하라고 지시하였다고 보도하였다.  
 
4월 24일에는 국민보 주필 승용환의 말을 인용하면서,  '한인들이 소지하고 있는 일본제품을 모아 불을 지를 것이다'라고 기사화했다. 이에 관하여 4월 25일 스타 블루틴은 아래와 같은 사설을 실었다.
 
"한인들이 소지한 일본제품을 불지른다는데, 자제할 것을 요구한다.  그런 행동은 방화와 파괴행위이다.  하와이 사회는 필수품 확보에 관심이많으며, 필수품 가격이 비싸진 지금 그런 과격한 파괴행동을 묵과할 수 없다.  정부는 미국 영토 내에서 일본측이든 한인 측이든 이런 과격한 행동을 철저히 봉쇄해야 한다."
 
한인들은 일본제품 불사르기를 하지 않았으며 (못했으며?),  일본제품 불매운동이 실행되었더라도 오래 지속되지 않은 것 같다.  
 
1913년에 대한인부인회가 조직되었을 때 목적 중 하나가 일본제품 불매 운동이었으나 '제대로 실행되지 못했다'고, 회원이었던 김차순이 생전에 일러 주었다.  
 
전체 인구의 2% 밖에 되지 않은 소수민족 한인들이 벌인 일본제품 불매운동과 일본인과의 같은 직장 거부 등은 그리 큰 영향을 미칠 수 없었고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그러나 한인들이 하와이 땅에서 같이 살고 있는 일본인에 대한 껄끄러운 감정이나 적대심을  표현했음을 알 수 있다.
 
 
4) 세계 여성지도자에게 호소
 
한인 소녀리그가 1919년 5월에 미주 본토, 영국, 불란서 등의 여성지도자들에게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는 편지를 보냈다. 
 
5월 28일 스타 블르틴은 이 소녀리그가 윌슨 대통령 부인에게도 편지를 보냈다고 기사화 하였다. 
 
이 편지는 '일본이 한인에게 행하는 잔악함을 설명하면서, 한국의 염원을 거부하는 것이 아시아와 전세계의 민주화에 미치는 영향이 어떠할 것이냐고 물었다'고 했다.  
 
이 편지에는 세계 여성들이 한국을 위해 영국의회에 편지를 보내줄 것을 부탁했는데,  19세 회장 최순이와 서기 신매리의 이름으로 보내졌다고 밝혔다.  
 
회장 최순이에 관하여는 알려진 것이 없는데, 성 누가 성공회교회에서 주일학교 교사로 또 오르간 반주자로 활동한 학생이 아닌가 추측한다. 
 
신매리는 신홍균 목사의 딸인데 3개월 되었을 때 하와이에 왔다. 
 
1922년에 이원순과 결혼하였고,  대한민국 건국 후 귀국하여 1955년부터 12년간 이회여자대학교에서 가르치고, 1967년에 국회의원에 선출되었다.
 
7월 14일에 스타 블루틴은 "한인 소녀들이 자유를 염원" 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실었다. 
 
여학생들이 윌슨 대통령과 파리 평화회에 참석하는 미국 대표들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우리들의 독립 선언을 들어줄 것을 기도하며,  전 세계에 알려주기 바랍니다." 라고 썼다는 기사였다.   
 
이 학생들이 전에 언급된 소녀리그 학생들 같으나, 이 리그가 얼마나 오래동안 지속되었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3.1 운동 소식 이후 하와이의 한인 여학생들이 담대하게 활동하였음을 알 수 있다.  
 
 
5) 카메하메하 대왕 축제에 "한국 독립 만세" 현수막
 
6월 10일 화요일 저녁에 1,000명이 넘은 한인들이 카메하메하 대왕 (서거) 100주년 축체 행진에 참여하였다. 
 
단순히 참여한 것이 아니라,  한문으로 "한국 독립 만세" 라는 현수막을 들어, 한국의 독립을 위한 노력이 진행되고 있음을 모든 참여자들에게 알렸다.  
 
이 축제 행진은 저녁 7시 30분에 아알라공원에서 시작하여 킹 스트리트를 딸아 카메하메하 대왕 동상이 있는 곳까지 갔다.  
 
일본인, 중국인, 필립핀인들은 색색의 등불을 들었는데, 한인들은  "한국 독립 만세"  현수막을 들었다. 
 
애드버타이저는 이 현수막이 일본인의 비위를 건드렸다고 보도하면서, 일본어 신문 닙푸지지의 기사를 소개하였다.
 
6월 16일자 닙부지지의 글은 '여러민족이 미국 땅에서 협동과 우호정신으로 사회행사를 치루는데, 일본의 속국인인 한인들이 정치적 행동을 하는 것은 질서를 문란하게 하는 행동이다.' 라는 요점이었다. 
 
또한 스타 블루틴은 닙부지지가 '이 행진에 참여한 일본인 수가 한인에 비하여 적었던 것은 하와이 대왕에 대한 관심이 없어서가 아니라, 한인들이 독립 현수막을 들고 행진한다는 소문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였다.'는 것 까지도 덧붙혔다.   
 
축제에 참석한 1,000여명 한인들이 철저한 준비와 기세로 일본인을 제압하였던 것이다.
 
닙부지지의 부정적인 기사에 국민회 회장 이종관이 6월 19일에 애드버타이저에 보낸 편지가 보도되었다. 
 
그의 요점은 ' 한인들도 하와이 사회의 일원으로 카메하메하대왕에 경외심을 갖고 있다.  
 
이 축제에 참가한 사람들은 태극기와 성조기를 들은 한인들이 대왕의 업적에 누가되는 행동을 하지 않은 것을 안다. 
 
한인 주최측 (국민회)은 '한국 독립 만세'라는 현수막을 준비하지 않았다. 
 
몇몇 일본인들이 시비를 걸고 있는데,  태극기가 째째한 일본인의 심기를 건드렸다면 한국에서 한인이 태극기를 들고 행진했을 때 일본인들이 얼마나 잔악하게 굴었을지 상상해 보야야 한다.  
 
닙부지지 편집인은 호놀룰루가 일본이 아니고 더구나 일본이 빼앗은 한국도 아님을 기억하기 바란다. '
 
 
6) 하와이서 독립운동 전개 계획 모임
 
6월 15일 일요일 오후에 1,500명 한인들이 누우아누 애베뉴 1179번지의 자유극장 (Liberty Theatre)에 모여 앞으로 하와이에서 독립운동을 어떻게 전개할 것인가를 계획하는 모임을 가졌다.  
 
1912년에 개관한 1,600석의 이 극장은 주위의 킹 스트리트, 베레타니아 스트리트와 누우아누 애베뉴로 전차가 다녔고, 국민회 총회관에서 걸어서 10분정도면 갈 수 있는 아주 편리한 곳이었다.
이 극장 부지는 현재 누우아누 애배뉴와 베레타니아 스트리트 모퉁이의 주차장 일부로 되어 있다. 

5,000명 한인 인구의 1/3이 참석하였는데,  마우이 섬과 하와이 섬의 한인들도 참석하였다.  
 
또한 미주 국민회 총연합회의 황사용 회장과 멕시코 국민회의 강영소도 참석한 것으로 미루어 사전 준비를 철저히 한 하였음을 알 수 있다.  
 
황사용,  강영소, 하와이 국민회 회장 이종관,  1918년 하와이 국민회 회장 안현경, 국민보 편집인 승용환의 연설이 있었다.  
 
이 모임에서 한국이 독립될 때까지 독립운동을 계속할 것을 결정하였다. 또한 하와이뿐만 아니라, 미주 본토, 멕시코, 러시아, 만주의 한인들이 합심하여 일본제품 불매운동을 계속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리고, 임시정부 대통령 이승만을 비롯한 내각에 절대적 신임을 표하면서, 이들이 내리는 결정 사항을 충실히 이행할 것이라고 결정하였다.  
 
 
8)  3.1 운동 1주년 기념식
 
1920년 2월 24일에 애드버타이저는 한인들이 3월 1일에 독립운동 1주년과 임시정부 수립 기념행사를 갖는다고 보도하면서, 국민회가 한인들이 가게 등을 닫고 모두 참여해 줄것을 당부하였다고도 했다. 
 
국민회는 3월 1일 월요일에 자유극장을 또다시 대절하고 3.1절 1주년 기념식을 거행했다. 
 
1,000여명이 참석하여 축사 등을 듣고 노래를 하였다고 애드버타이저가 3월 2일에 보도했다.   
 
어떤 노래들을 불렀는지는 모르겠으나, 하와이에서 <아리랑>을 불렀다는 첫번 기록은 1928-1930년초 한인 YWCA의 형제클럽 회원이 불렀다는 것인데, 가사는 알려지지 않는다. 
 
가사가 남아 있는 아리랑은 1948년 1월에 있었던 그리스도교회의 연초모임이었다.  
 
따라서 3.1 운동 1주년 기념식에서는 <아리랑>을 부르지 못했을 것이다.   
 
1925년에 와히아와에 조직된 한미클럽(Korean American Club)이 <조선국가> 애국가를 인쇄하였는데,  1920년에 이미 이 애국가를 부르고 있었다면, 3.1운동 1 주년 기념식에서 불렀을 것이다.  
 
 
<<맺는말 >>
1920년 인구조사에 미주 대륙에는 한인 1,165명이 29개 주에 흩어져 있는 것으로 집계되었다. 이들 중 755명이 캘리포니아 주에 살았다.  
 
한인 4,950명이 살고 있었던 하와이가 한인 디아스포라의 거점이었고, 명실공히 하와이 한인들은 꾸준히 계속하여 국권회복/독립운동을 후원하였다.  
 
하와이 한인들이 이끌어 간 많은 활동 중 대한부인구제회는 30년 동안 민주공화국 대한민국 건립에 아낌없는 후원을 지속하였고, 그 후 10여년 동안도 대한민국의 발전을 위해 활동하였다.  
 
약  200명 정도의 부인구제회 회원 중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로 포상받은 이는 박신애 (애족장 1997), 심영신 (애국장 1997), 이희경 (건국포장 2002), 전수산 (건국포장 2002), 황마리아 (애족장 2017) 뿐이다.  
 
부인구제회 회장을 지낸 천연희의 딸 매리 자보(Mary Zarbaugh, 1919년 생)는 '어머니가 국가에서 상을 받으려고 조국의 독립을 위해 노력하고 희생한 것이 아니다' 라며 포상받지 못한 것에 개의치 않는다. 
 
그러나 이제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하와이의 우리는 부인구제회 회원 모두를 독립유공자로 포상 받도록 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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